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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기록문화유산

성삼문선생유허비문

成三問先生遺墟碑文

※ 해제


성삼문선생유허비문(成三問先生遺墟碑文)은 조선 전기의 충신인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의 유허지 내의 비석을 탁본한 것으로, 비문과 추기(追記)의 합본이다.


성삼문의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아버지는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그는 1438(세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어린 임금을 충심으로 보필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후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 성승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했다. 이때 함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쳤던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사육신(死六臣)으로 불리며 칭송되고 있다.


본 유물은 성삼문의 유허지에 있는 비문을 탁본한 것으로, 우측의 비문과 좌측의 추기가 합본되어 있다. 우측 비문은 洪州魯恩洞成先生遺墟碑라는 비제가 있으며, 하단에 비문의 찬자와 서사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 글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겸영경연사(兼營經筵事)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겸동지경연사(兼同知經筵事) 김진상(金鎭商, 1684~1755년)이 글씨를 썼고, 대광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유척기(俞拓基, 1691~1767년)가 전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비제에 기록되어 있는 홍주 노은동은 그의 외가가 있는 곳이자 출생지로,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이다. 비문의 내용은 그의 인물 정보와 삼문(三問)이라는 이름의 유래,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맞이한 의로운 죽음, 주변 지인들의 칭송 등을 절절히 읊고 있다.


이 내용은 성삼문의 문집인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 4 부록의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찬자인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171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은 모두 글자의 출입 없이 일치하는데, 탁본에는 원문 마지막 줄 하단에 작은 글씨로 적동은 노은동의 옛 지명이다[赤洞魯恩洞).’라는 주가 첨가되어 있다. 비문에서 홍주 노은동을 적동리(赤洞里)로 표현한 것에 대해 설명해 준 것이다. 다만 별다른 간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비문의 작성 연도는 확정할 수 없다.


반면 좌측의 추기는 작성 연대가 확인되는데, 비문 말미의 崇禎甲申後百單一年甲子四月日也 後學坡平尹氏尹鳳九記 德水李箕鎭書라고 기록을 통해 1744(영조 20) 4월에 후학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윤봉구(尹鳳九, 1681~1767년)가 비문을 지었으며, 덕수이씨(德水李氏) 이기진(李箕鎭, 1687~1755년)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윤봉구의 문집인 『병계선생집(屛溪先生集)』 48홍주성선생(삼문)유허비추기洪州成先生(三問)遺墟碑追記라는 제목으로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암이 비문을 찬한 이후의 비석 관련 여러 일들과, 우암이 찬한 비문에 궐자가 있어 사림들이 오래도록 안타깝게 여겼던 바였다는 내용 등을 추가로 기록하였다.


본 유물은 성삼문의 비문과 추기를 함께 탁본한 것으로, 비록 작성 연대와 찬자는 각기 다르지만 비문의 작성과 비석의 건립 과정 경위 등을 아울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또한 비문의 내용은 성삼문의 생전 일화와 주변 사람들의 평가 등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사육신 연구에 보탬이 되는 자료이다.


※ 목차


: 洪州魯恩洞成先生遺墟碑文

: 洪州成先生三問遺墟碑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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