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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기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昌德宮 摛文院 測雨臺

  • 유물번호

    창덕12942
  • 연대

    1782년
  • 재질

    석제
  • 크기(cm)

    가로 45.5cm, 세로 45.5cm, 높이 31cm
  • 지정현황

    국보

첨부파일 :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이다. 측우기의 받침대인 측우대의 표면에는 제작과 설치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1782년(정조 6) 정조가 가뭄이 극심하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측우기의 제작 규정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측우기를 서운관(書雲觀)과 전국의 군현에 설치한 사실과 영조 때 창덕궁 · 경희궁과 전국에 설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의 측우기는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복제하여 올려놓은 것이다. 측우대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측우기는 실로 세종 24년(143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었다. 높이가 1자(尺) 5치(寸)이며 지름이 7치(寸)이다. 서운관(書雲觀)과 각 도의 고을에 두고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 경희궁 두 궁궐과 팔도와 한성부 ·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그 그릇은 비록 작으나마 세종과 영조 두 성군께서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다스리는 데 크게 힘쓰신 뜻이 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영조 6년(1730)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기우제를 여러 번 올렸으나 영험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성상께서 자기를 죄책하고 언로(言路)를 터놓으며 몸소 기우단[우단(雩壇)]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일산(日傘)을 물리치고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한데서 지내며[노처(露處)] 제사를 올린 뒤에도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大駕)를 머무르고 사형수 이외의 경한 범죄는 모두 석방하였다. 이날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사녀(士女)]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우는 사람까지 있어서 하는 말이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서 이렇게도 애쓰시니 어찌 비가 오지 않을 것이며, 비가 비록 오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기꺼워하는 것은 비온 것과 같다’고 했다. 해가 지기도 전에 과연 큰 비가 밤까지 내려서 1치(寸) 2푼(分)이나 내렸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성상께서 지성하심을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미흡한 것을 걱정하시고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이문원(摛文院)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비가 이미 흡족해서 신 염조(念祖)와 신 지검(志儉)에게 글을 쓰라 하시니 대개 기쁨을 기념하려 한 것이다. 신 등은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이라 그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먼저 성상께서 백성을 위하여 걱정할 것을 알고 감히 그 걱정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비가 오고서는 꼭 먼저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기꺼워할 것을 알고 감히 그 기쁨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겠으랴. 그래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려서 명(銘)을 한다.相此分寸 度彼方墺 분촌을 상상해서 저 전국 사정을 알 수 있다.少固慮旱 多亦傷澇 적으면 가물까 보아 염려하고 많으면 홍수에 상할세라.繼玆萬年 惟適是禱 이로부터 언제고 적당하기만 비노라.직제학 신 심염조(沈念祖)는 분부를 받아 글을 짓고 직제학 신 정지검(鄭志儉)은 분부를 받아 글씨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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