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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石製 辛未以降 甲午文科 己未台閣 庚辰致仕 印章

  • 유물번호

    창덕7798
  • 연대

  • 재질

    석인
  • 크기(cm)

    가로: 5.1, 세로: 5.0, 높이: 7.9

첨부파일 :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석제 '신미이강 갑오문과 기미태각 경진치사' 인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서체: 한인전(漢印篆)
사용자: 유척기

인장은 사용자의 신분이나 신용을 나타낸다. 조선왕조의 인장은 국새나 관인 등 국가업무용 인장, 왕과 왕비의 존업성을 상징하던 어보(御寶)를 비롯하여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던 사인(私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사인은 인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유척기(兪拓基, 1691~1767)는 조선 영조대의 명재상이자 유명한 금석학자로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714년 증광문과에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삼사를 거쳐 1721년에는 왕세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淸)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회 때 탄핵을 받고 홍원헌에 유배되었다. 1725년 노론이 집권한 후 대사간으로 등용되어 호조판서 · 우의정 · 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의 권위자답게 많은 비문에 글씨를 남겼다. 특히 전서를 잘 썼으며, 스스로 새긴 인장은 명나라의 인풍을 따랐다. 그의 묘 이장 때에 수백 방의 인장이 담긴 철함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말 금석학의 일인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외가이기도 한 기계 유씨 가문은 유척기를 비롯해, 전예(篆隸) 서풍의 대가인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와 저암 유한준(兪漢雋, 1732~1811) 등 많은 명서가를 배출했다. 저서로는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있다.유척기 자신의 주요 이력을 새긴 인장이다. 유척기는 숙종 17년(1691) 신미년에 태어났으며, 숙종 40년(1714) 갑오년에 증광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갔다. 영조 15년(1739) 기미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영조 36년(1760) 경진년 나이 70에 치사[(致仕), 관직에서 물러남]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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