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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0368_정조가 광릉 주변의 백성들에게 내힌 윤음을 새긴 현판.jpg

현판

정조가 광릉 주변의 백성들에게 내힌 윤음을 새긴 현판

御製諭楊州抱川父老民人等書

  • 유물번호

    창덕20368
  • 연대

  • 재질

    나무
  • 크기(cm)

    세로: 75.0, 가로: 184.0

첨부파일 :

OPEN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정조가 광릉 주변의 백성들에게 내힌 윤음을 새긴 현판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의 능인 광릉(光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양주부(楊州府)의 동헌(東軒)에 머무르며 양주 및 포천의 노인과 백성들에게 내린 윤음(綸音)이다. 유생이나 무사들의 시험을 치르고 백성들에게 각종 은혜를 베풀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정조가 명하여 경기감사 서정수(徐鼎修, 1749~1804)가 썼다. 뒷면에 광릉(光陵)’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이 현판이 광릉에서 보관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 911일에 양주숙소(楊州宿所)에 입시(入侍)했을 때
양주와 포천(抱川)의 부로(父老)와 백성들에게 유시(諭示)한 글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 훌륭하신 우리 성조(聖祖) 광릉조(光陵朝)에서는 무()로 대략(大略)을 정하고 문()으로 태평(太平)을 이룩하시어 신공(神功)이 팔도에 입혀지고 큰 음덕이 만대에 내려졌다. , 창포 김치의 맛을 즐기고 서서(西序)의 홍벽(弘璧)을 보매 지금도 다시 뵙는 듯한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곳은 선비가 많이 나온 고장이며 용이 날고 봉황이 나는 듯한 모양의 길지(吉地)인데다가 한대(漢代) 왕릉(王陵)의 치중(治中)의 제도를 사용하고 주가(周家)의 무강(無疆)한 책력으로 날짜를 가린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 소자가 재계(齋戒)하고 제복(祭服)을 입은 다음 일찍 출발하여 길일에 이 능을 전배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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