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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영조가 명릉 참배 후 지은 글을 새긴 현판
御製記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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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번호
창덕20960 -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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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나무 -
크기(cm)
세로: 44.0, 가로: 89.5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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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재위 1724~1776년)가 1758년(영조 34년) 1월 25일 숙종(肅宗, 재위 1674~1720년),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년),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년)의 능인 명릉(明陵)을 참배한 후의 감회를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년)에게 적게 하여 명릉 재실에 걸었던 현판이다. 1757년(영조 33년)에 명릉에 조성했던 인원왕후 릉의 배치와 영조의 회고를 기록하였다.
재실에 기록하다.
능 앞에 정자각 하나, 제수를 차려 놓을 걸상 세 개를 두는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신축년(1721년) 나는 왕자로서 산릉(山陵)을 배제(陪祭)한 날에 묘자리가 북동쪽을 등지고 남서쪽으로 향한 능을 살펴보았다. 재작년(1756년) 능에 가서 또 살펴보았는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동남쪽을 등지고 서북쪽으로 향한 묘자리로 정하였다.
작년(1757년) 가을 인산(因山) 인원왕후 장례 시에는 수도각(隧道閣)이 있고 또 포장이 설치되어 있어서 분명하게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년 봄, 전알(展謁)하는 날 상세히 살펴보니 처음 정한 묏자리보다 좋을 뿐 만 아니라, 구릉(舊陵)과도 가까운데 중간에 장애물 하나 없었다. 그래서 선조가 남기신 가르침과 어머니의 뜻이 부합됨을 우러러 감탄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참배하러 가도 면목이 설 터인데 이것은 누구의 공인가? 즉 종신(宗臣) 남원 돈장(南原敦匠)과 여러 신하들이 정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어서야 어찌 되겠는가? 그 개요를 간략히 기록해서 그때 총호사(總護使)를 지낸 영의정에게 명을 내려 깨끗이 쓰게 하여 재실에 붙여 두도록 하였다.
황조 승정 기원후 세 번째 무인년(1758년) 1월 하순에 눈물을 머금고 기록함.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신(臣) 이천보(李天輔)가 교지를 받들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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