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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익성군댁'명병
白磁鐵畵'益城君宅'銘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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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번호
고궁995 -
연대
조선 16세기 -
재질
백자 -
크기(cm)
높이: 37.6cm, 지름: 20.2cm
첨부파일 :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백자철화'익성군댁'명병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이 병은 조선 전기의 넓은 구연(口緣)과 양감있는 몸체를 가진 옥호춘병(玉壺春甁) 계열로 동시기에 제작된 병들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다소 큰 편이다. 이 병은 기본적으로 순백자(純白磁)이나, 동체의 하단에 '益城君宅(익성군택)'이라는 명문(銘文)이 철화로 선명하고 단정하게 쓰여 있다. 이 익성군이라는 명문으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라는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 익성군(1566~1614)은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향령(享齡), 자는 수원(壽元)이다. 덕흥대원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하원군(河源君) 의헌공 이정(李鋥)이며, 어머니 남양군부인(南陽郡夫人) 홍씨로 영의정 홍섬(洪暹)의 딸이다. 하원군의 2남으로 명종 21년(1566)에 태어나 13세에 익성정(益城正)이 되고 얼마후에 도정(都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에 머물자 그곳에 가 있었으며 서울로 돌아와 선조 30년(1597) 익성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4년(1612) 이이첨의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태토 표면에 미세한 잡티가 있고 담청색의 유약을 씌웠으나 연회청색을 띠는 점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관요 백자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목부분을 제외하고 몸체와 굽부분의 형태는 16세기 후반의 경기도 광주 관요에서 제작된 것과 동일하다. 더욱이 경기도 광주는 탄벌리, 선동리, 송정리요의 백자와 유색(釉色)ㆍ형질(形質)이 유사하다. 굽의 형태와 곡선, 작은 규석이 섞인 모래받침 또한 전형적이다. 표면의 명문은 철안료로 쓰여 있는데, 유약이 얇아 철안료가 표면에 떠 보이는 것은 남아있는 유물 가운데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명문의 시기와 유물의 특징이 일치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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