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왕희지체 초결백운가
王羲之草訣百韻歌
-
유물번호
창덕6713_뒷면 왼쪽 -
연대
-
재질
미정질 대리암(회색) -
크기(cm)
세로: 28.0~28.3, 가로: 36.5~40.2, 두께: 5.3~6.4
첨부파일 :
국립고궁박물관이 창작한 왕희지체 초결백운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서예는 대체로 일관된 글씨 풍이 계승되었는데, 이러한 바탕에는 왕실에서 일정하게 깊은 관심으로 애호했던 왕희지와 조맹부의 글씨체의 영향이 컸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각석 중 왕희지 글씨체는 초결백운가나 서첩 중에 있는 초서와 난정기, 필진도 등의 해서가 새겨져 있다.
이 각석은 초서(草書)를 익히기 위하여 다섯자씩 구를 만든 것이다. 학습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문장을 다소 무리하게 지어 문맥이 잘 통하지 않은 곳도 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석각에 초결백운가 전문(全文)이 남아있지 않고 일부만 있는데 아마 석각이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각석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忽訝劉如對 유(劉)가 대(對)와 같은 것을 홀연히 의심하게 되고
從來缶似垂 부(缶)가 수(垂)와 종래에 글자가 비슷하다.
含貪眞不偶 함(含)과 탐(貪)도 참으로 짝이 아니며
退邑尙參差 퇴(退)와 읍(邑)도 여전히 차이가 있다.
減滅何曾誤 감(減)과 멸(滅)을 어찌 잘못 알리오
黨堂未易追 당(黨)과 당(堂)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관련정보